<Philippe Parreno : VOICES >
필립 파레노 : 보이스
2024.02.28. ~ 2024.07.07
입장료 : 성인 18,000
청소년, 청년, 대학(원)생, 시니어 9,000
장애인, 국가유공자, 군인, 경찰, 소방관, 문화누리카드, 예술인, 미취학 아동 무료
장소 : 리움미술관
리움미술관에서 작년에 가장 핫했던 전시는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WE 였을 것이다.
올해는 필립 파레노로 시작하는 분위기다.
리움 미술관에 들어서면 의례 그러하듯 챔프커피에서 달디단 라떼 한 잔을 마신다. 전시가 바뀔 때 마다 컨셉에 맞게 특별 메뉴가 하나씩 추가되곤 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카라멜 크림 라떼인 ‘웰컴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AI가 만들었다는, 시간에 따른 풍경 영상이 나오고 있는 로비에 앉아 작품을 보다가, M2로 들어가 본격 작품 탐구를 시작했다.
전시를 보기 전에 가장 기대했던 작품은 <내 방은 또 다른 어항> 이었는데, 전시장 여기저기에 자유롭게 떠있는 물고기 모양의 풍선들의 사진 한 장을 보는 순간, 나는 당장 전시장으로 달려가 마치 어항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몽환적인 기분을 느끼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처음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갑자기 다른 세계로 전환 된 듯 따뜻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것은 바로 창문 가득 들어오는 오렌지 빛 때문이었다. 그 짧은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 오묘한 빛이 내 몸을 감싸는 느낌이었거든.
바로 <석양빛 만, 가브리엘 타드의 지저 인간: 미래 역사의 단편> 이라는 작품이었다.
고요한 창문가에 한마리 물고기가 와서 조용히 머물렀다.
그리고 곧 다른 한 마리가 둥실 다가왔다.
반대편 창문 밖에는 <혼란의 시기: 일 년 중 십일 개월은 예술 작품이고 12월은 크리스마스> 라는 작품명에 걸맞게 예쁜 크리스마스 트리가 전시되어 있었고 <리얼리티 파크의 눈사람>이 번들거리며 그대로 조금씩 녹아 내리고 있었다.
마치 그 따스한 빛 때문인 것만 같았다.
행복한 소멸이었다.
피아노 건반을 불규칙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오고 있었는데, 그것은 <여름 없는 한 해> 라는 작품으로 야마하 피아노 위에서 돌고 있는 도르레에 의한 소리였다. 그 도르레는 주황빛 인공 눈을 창조해 내고 있었다. 결국 소리를 내려면 무언가는 갈려나가야 하는 것인가.
돌고래와 다양한 모양의 물고기들이 전시장 전체를 떠다니며 사람들을 쫓아다니고 있기에 자꾸만 사람들이 물고기를 만지려고 하였다.
물고기도 작품이란 사실을 망각하는지. 전시장 스텝들은 계속 해서 그들에게 다가가 주의를 주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안쪽 벽 면에는 노랑이 가득한 영상이 재상되고 있었는데, 바로 <꽃> 이라는, 그야말로 꽃을 엄청나게 확대해서 촬영한 작품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노란 빛 앞으로도 물고기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피아노 소리가 기묘하게 전시장의 분위기를 긴장시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불쑥,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목소리임이 분명하지만, 뭐라고 말하는 지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중간 중간 '내 이름은...' '내 이름은......'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로 존재하는 <∂A>라는 작품이었고, 목소리가 낯선 듯 익숙하다 했는데, 배우 배두나의 목소리라고 했다.
윗 층에서는 <안리: 유령이 아닌, 그저 껍데기>와 <세상 밖 어디든> 이라는 작품을 통해 보다 분명하게 배두나의 나레이션을 들을 수 있었다. 공각기동대의 안리라는 캐릭터에 삼차원성을 부여하고 상품화하여 비로소 자신의 존재감에 대해 인지하게 된 그녀의 독백이었다.
내 이름은
내 이름은
내 이름은
안리
안리
내 이름은 안리
철자는 아무래도 좋아!
상관없어! 정말이야, 상관없어.
나는 46000엔에 팔렸어.
46000엔
미화 400달러가
디자인 캐릭터 회사 ‘K’ 공장에
지불되었지!
나는 결국
나는 결국 망가 카탈로그에 나오는 다른 이들처럼 되고 말았어
만화 제작자들과 만화책 편집자들에게 제안되어
만화책 속에서 덜컥 죽어버렸지!
어떤 캐릭터들은……
어떤 캐릭터들은 영웅이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어.
그들은 긴 분량의 심리적 서술, 개인사,
그리고 내레이션을 만들어 낼 재료를 지니고 있었지.
내가 쌌을 때 그들은 정말 비쌌어!
개성이 없어……
내가 어떤 종류의 이야기에라도 합류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그중 어떤 이야기에서도 생존할 가망은 없었어.
나는 생존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어……
그건 사실이야
그건 사실이야……
내가 하는 모든 말은……
사실이야……
죄인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이름은 가명으로 대체되었어.
나는 상품이야
내가 채웠어야 했을 시장에서 자유로워진 상품
만화책 속에서 덜컥 죽어버린
나는 절대 잊지 않을 거야
내게는 그저 이름과 아이디밖에 없었어
내 이름은 안리!
내 이름은 안리!
철자는 아무래도 좋아!
상관없어! 정말이야, 상관없어
팔린 다음, 나는 다시 디자인되었어!
‘생기 있게(animated)’ 되기 위해
우습지! 나는 이제 심지어 말도 할 수 있어! 봐!
이게 바로 예전의 내 모습이야!
그리고 이게 바로 지금의 내 모습이고.
당신이 옛 사진을 가리킬 때 그런 것처럼 말이야.
아! 그래! 깜박하고 말해주지 않았는데
지금 당신이 듣고 있는 이 목소리는 한 번도 내 목소리였던 적이 없었어.
나는 목소리를 한 번도 가진 적이 없었어
그것은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어.
다니엘라라는 이름의 젊은 여자.
다니엘라는 모델이었지
가수이기도 했어
비록 그 일은 그녀의 인생에서 나중에 일어나겠지만.
그녀는 말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어
그녀는 말을 하며 실수를 저질렀지.
그녀는 이미지였어, 마치 내가 그런 것처럼.
그녀는 이미지였어, 마치 내가 그런 것처럼.
내가 아무것도 팔 게 없을 때, 그녀는 상품을 곧잘 팔곤 했지.
그리고 나는 절대 아무것도 팔지 못할 거야.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왜냐하면-내가-상품이니까-말이야.
나는 팔렸지,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나는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아.
나는 어떤 종류의 상상의 재료로도 나를 채울 수 있는 모두에게 속해 있지.
어디든, 이 세상 밖이라면 어디든.
그곳이 어디든!
그곳이 어디든!
그곳이 이 세상 밖이기만 하다면!
나는 가상의 캐릭터야
하나의 기호
유령(ghost)이 아닌
그저 껍데기(shell)
M2를 나와 복도를 지나 건너편 블랙박스에서는 3개의 영상이 차례로 상영중이었는데, <마릴린>, <귀머거리의 집>, <지속적 생명체 거주 가능 영역(C.H.Z) 이었다.
따뜻하고 밝은 느낌의 마를린이 머물던 호텔의 인테리를 비추며 전화벨이 울리던 영상이 끝나고, 곧 장작이 타는 소리, 날아가는 불씨들, 어딘가 익숙한 어두운 느낌의 그림들이 보였다.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장면이 나왔을 때 나는 곧 이것이 고야의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라는 것을 알아챘다. <귀머거리의 집>은 고야의 <검은 회화> 14점이 있던 집을 묘사한 것이라고 했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서 촬영했다고 해서 괜히 반가웠다. (좋아하는 미술관이다-)
영상을 보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아래쪽 전시장으로 내려가려는데 갑자기 앞에 삭발을 하고 검붉은 색의 셔츠를 입은 남자가 취-취치익-취익- 소리를 내며 손과 몸으로 특정 동작을 취했다. 느닷없는 광경이라 살짝 놀라서, 그 사람을 어떤 시선으로 쳐다봐야 할지 살짝 고민 했다.
알고보니 그라운드 갤러리에는 <깜박이는 불빛 56개> 라는 작품으로 전체 벽에 전구들이 붙어있었는데, 그것이 깜빡이는 것은 바로 퍼포머들의 소리에 의해서였고, 퍼포머들은 차례대로 관객들과 함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소리와 몸짓을 시작해서 전시장을 가로질러 다시 위로 올라가는 동선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천장에는 투명한 말풍선 모양의 <말풍선>이 가득 떠 있었는데, 소리들이 그 어떤 문자나 이미지도 담겨 있지 않은 채 하나의 투명한 구름이 되어 되어 떠 오르는 것을 표현 했다고 한다.
전시장의 소리들은 또한 리움 미술관 정원에 설치되어 있는 철탑같이 생긴 <막> 이라는 인공지능 기계에 의해 수집된 온도, 습도, 바람, 소음, 진동 같은 것들을 전시장 내부에서 소리로 재현하여 내-외부의 환경을 일체화 시키는 역할을 한 것이기도 했다.
전시의 시작부터 끝까지 빛, 소리, 움직임들 속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는데, 아마도 매 번 소리나 시각적 자극이 달라질 테니 같은 작품을 경험하는 사람은 없겠구나, 모두 다른걸 보고 듣고 느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체험형, 경험적 전시였다.
아직 겨울이 채 가시지 않은 추웠던 이른 봄에, 미술관 정원 한 켠에서 <꽃> 이라는 작품과 같은 노오란 빛깔의 꽃이 피어 있는 걸 보았다.
예술과 자연의 경계는 어디일까?
리움미술관 전시안내 : https://www.leeumhoam.org/leeum/exhibition/76
리움미술관 예매 페이지 : https://ticket.leeum.org/leeum/personal/exhibitList.do
필립 파레노 작품 소개 : https://www.leeumhoam.org/qr/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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